4.
어딜 봐도 그는 선생 티가 안 났다.
평소에도 추레한 츄리닝과 슬리퍼 차림의 그는
세안를 하는 지 마는 지 항상 왕방울만한 눈곱을 달고 다녔고
오 십줄 인데도 팔순에 가까운 거칠고 질서 없는 머리카락을 소유한, 성격 또한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근래 보기 드문 외계종이였다.
때는 일본에서 막 난초바람이 불어 닥치던 시점이었네.
선사 이래 난초는 지천에 깔렸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극히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소위 ‘ 귀족 문화 ’ 였네.
중세의 ‘성경’ 처럼 말이네.
이러한 난문화가 오랜 곡점을 지나 대중이 자각하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전이라네.
그때야말로 내가 가는 곳이 바로 난 산지였고 개척지였지.
바야흐로 난초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거였네.
지금에야 웬만한 산지는 전국구가 되어 그 씨가 마른 상태지만 말이야.
혈기왕성했던 그때의 나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느꼈을 만한 기쁨을 만끽하며
온 산천을 누비고 다녔다네. 그러던 어느 날,
단엽에 서반을 물고 나오는 종자가 나오는 밭을 가게 되었다네.
해마다 어김없이 한두 촉 씩 올라와 주는 나만의 효자 밭이었는데,
그 날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네. 그 대신
나뭇가지에 대롱거리며 달려있는 한 통의 ‘ 막걸리 ’ 를 보게 되었지.
자세히 들여 다 보니, ‘한 잔 하시게, 한 발 늦었네’ 라고 쓰여 있지 않겠나.
이런 우라질! 묻어 놓은 생강근 까지 싹쓸이 해 간 것을 보니 보통 놈은 아니었지.
뒷통수를 얻어맞은 나는 그만 맥이 빠져 그 자리에 텉썩 주저 앉고 말았는데 오마이 갓.
언제부터 거기 그렇게 있었던 건지 큰 독사 한 마리가 나를 노려보며
떡하니 고개를 쳐들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만 숨이 멎을 것 같았지. 순간이 영원 같았다네.
그렇게 얼마간 꼼짝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가
노련하고 세련된 내가 먼저 말했다네.
셋 샐 동안 각자 가던 길 가자고 말이야.
하하. 나는 알고 있었다네. 맹수는 맹수를 알아보는 법!
그렇게 셋을 세고 나는 꽁지 빠지게 내뺐다네.
난이고 뭣이고 다 내팽개친 채 고개에 고개를 넘고 계곡에 계곡을 넘어 달리고 또 달렸다네.
꾼이 한 낯 ‘ 뱀 ’ 가지고 뭘 그렇게 까지 야단을 떠냐고?
보통 뱀이었으면 달랐겠지. 하지만 그날 만난 그 독사 놈은
뱀의 수준을 넘어선, 그렇지 예의 그 파충류의 ‘ 특이점 ’ 을 넘어선 놈이었어.
‘ 특이점 ’ 이라시면?
의심이 가득 찬 얼굴로 막내가 물었다
흠..원래 이 단어는
인공지능이 그 설정 값을 넘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기점을 말하는 것이네.
그니까 ‘ 자체진화 ’ 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되네.
이는 자연계도 예외는 아니라서 인간은 물론이고
이 세상 만물이라면 모두 이 ‘ 특이점 ’ 지니게 되어있지.
다만, 이것은 동일하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자각 수준>에 따라
달리 일어나는 것이네. 흔히들 말하는 ‘ 깨달음 ’ 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네
딱 그 때 본 ‘ 뱀 ’ 이 그랬다네. 이미 그것은 더 이상 뱀이 아니었다네.
그 뿐 아니라 그 시공간에 있던 유무형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뭔가>를 보여 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달까. 안타깝게도, 우둔한 나만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지. 극심한 ‘ 두려움 ’ 으로 말이야.
하여튼,
그렇게 달리고 달리다 지친 나는 결국 어느 나무아래서 숨을 고르게 되었다네.
한동안 그러고 있다 순간 기절초풍할 뻔 했다네. 내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 한 발 늦었네 ’ 그 막걸리 통이었네.
그렇다네. 어찌된 일인지 나는 돌고 돌아 다시 그 곳에 와 있었던 거네.
소름이 돋아 얼른 자리를 피해 일어서려는데, 그 와중에 저만치서 매직아이처럼
난초 하나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나 참, 그냥 갈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냉큼 그 곳으로 가보니, 이제 막 꽃봉오리를 올린 어미 난 이었다네.
심상찮은 자태라 절로 봉오리에 손이 갔는데, 아,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어디서 튀어 나왔는 지 갑자기 무시무시한 아가리가 나타나 내 팔목을 꽈악 물지 않았겠나.
으아악, 펄쩍 뛰며 물린 팔목을 보니 피는 철철 흐르지, 살갗은 시퍼렇게 달아오르지.
나는 지체 없이 ‘ 독 ’ 을 빨아내기 시작했다네. 이 섹시한 입술로 말이네.
하하, 그렇다네.
나의 이 기똥찬 순발력으로 비록 생명은 건졌지만,
그 댓가로 이렇게 치아가 모두 녹아버렸다네.
쯧,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나를 보지들 말게. 엄밀히 따지면 거래를 한 셈이니까.
그러니까 이 준수한 외모를 내어 주는 대신, 이 세상에 단하나 뿐인
고귀한 종자를 건졌으니 말이네.
그게 어디 있냐고?
아하, 개봉박두! 놀라지나 마시게, 그게 바로 여기 있는 복색두화소심,
일명 ‘ 색즉시공 ’ 이라네
흡사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하듯 그가 말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일제히 그가 치켜든 집게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텅 빈 걸이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무어라, 안 보이신다?
아하, 거짓부렁일랑 마시게.
그 날고 긴다는 고수들도 알현치 못한 그 귀한 종자들을 잡아 올 정도로
<깊이 진화된> 자네들이 아닌가.
자자,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유심히 보시게.
어떤가, 이제야 보이시는가.
하지만 조심들 하시게. 자칫 잘못하다간 꽃잎에 마음을 베일 수도 있으니.
그건 그렇고,
날씨도 꿀꿀한데
막걸리에 파전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