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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고 장터로 돌아오니, 경매대 위 난분 줄이 한층 늘어나 있었다.
경매시간이 다가오자 상인들은 미처 팔지 못한 종자목들을 조금 손해 보고라도 팔아 자금이 묶이는 것을 막으려는 심산이었다.
소비자 입장에선 절호의 찬스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과 달리 명명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명명품 이라 해도 오랜 역사를 가진 태극선은 말할 것도 없고,
근 이삼십년 동안 묵직하게 촉에 백 만원 대를 유지하던 품종까지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특히나, 신라, 일월화는 ‘태극선’의 비극적인 말로를 재연하지 않기 위해
난계 거상들이 안간힘을 써서 잡고 있다는 풍문이 무색할 정도로
요 몇일 사이에 그 가치가 내리막 일로를 걷고 있는 듯했다.
얼마 전 우리 난실을 방문한 예의 난계거상 한 분도 ‘태극선’과 같이 좋은 품종에 값싼 가격을 형성하는 국민난초들을
농가에 무료로 배급하여 수익을 창출하게 하면 난초 대중화가 목전이지 않겠냐는 야심찬 포부를 읊은 바도 있다.
하지만, 일반 화훼와는 달리 배양이 까다로워 종자목 번식에 어려움이 많은 한국난초가 대중과 만나기는
글쎄, 어째 요원해 보인다.
‘일월화’의 가격하락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요.
이런 초자의 심경이 눈에 보이기라도 한 듯 나대로 씨가 말했다.
이어,
난초 큰 시장인 중국에서 ‘일월화’를 대량으로 구입한 뒤 무한대로 촉수를 불려 내달께 배로 실어와
국내에 뿌린다는 소문이 상인들 사이에 자자했답니다.
그 소문으로 일월화를 고가에 구입하여 배양 중이었던 소장가들이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원전에도 못 미치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앞 다투어 내다팔기 시작 했구요.
형수님이 바로 그 결과를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거구요. 했다.
하지만, 나대로 씨. ‘신라’나 ‘사천왕’ 같은 경우는 일본에 헐값에 팔려나갔다가
오히려 고가에 역수입 된 것이라 알고 있어요.
내가 말하고 내가 놀랬다. 서당 개가 풍월을 읊은 격이다.
오호~그러게요 형수님. 어느 경우든 우리나라의 좋은 종자목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국내 난초 시장의 안정을 꾀한다는 면도 있지만, 우리고유의 종자목이 타국으로 넘어가
‘배양종’으로 둔갑되어 배포되는 것이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일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안 팔면 되지 않아요?
형수님. 그게 그리 말처럼 쉽지가 않답니다. 난초시장은 대략 세 부류로 나눠져요.
난초가 돈이 된다는 걸 알고 난초를 산채하러 다니는 현대판 심마니인 난초 산채꾼들,
그 산채꾼들에게 저렴하게 난을 구입하고 소장가들에게 몇 곱의 값을 매겨 파는 상인들,
마지막으로 난초를 사랑하고 배양하는 것을 낙으로 삶는 소장가가 있어요.
넷 망이 발달한 지금에는 모두가 산채꾼이자 상인이자 소장가임을 자처하며 그 경계가 모호해 지고 있지만요.
상황이 이러다보니, 이전에 막대한 부를 창출하던 상인의 입지가 졸지에 난처해지면서 그들은 살길을 모색하게 되지요.
참으로 기발한 형태로요.
기발하다면?
그 대표적인 것이 ‘조작’ 이지요.
앞서 언급한 화학약품을 이용해서 색감이나 무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버리거나,
일명 인큐베이터 안에서 24시간 가온해서 무한대로 품종의 수량을 조절하거나,
조직을 배양을 해서 그 품종을 통째로 개량한다거나..이 외에도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그 예는 수 없이 많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실태가 난계에서 암묵적으로 먹히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공히 애란인 이라 자처하는 난계 모든 인사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며 그 책임을 전적으로 ‘구매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덩달아 상인들의 ‘돈독’은 극에 닿아 돈이 된다면야 한국난초라도 팔아 역수입이든 뭐든 개의치 않는다는 겁니다.
큰일이군요.
그러니 형수님. 난계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랍니다. 하며 이죽거렸다.
그 ‘이상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번개를 맞은 듯 생각이 나서,
그래, 그래서 어찌됐나요? 그 ‘납치’ 말이에요 물었다
웬걸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그것>이 감쪽같이 사라진 다음에야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안타깝긴 매한가지지만 난초는 인연초라 했으니 그 인연을 바랄밖에요.
나는 맥이 빠졌다. 범인을 찾아내 요절을 냈을 거란 드라마의 한 장면을 기대한 나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이야기 값으로 그 비싼 한우를 사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다 치고 나대로 씨의 말을 듣고 나니 병아리 안목으로 난초를 샀다간 남편에게 경을 칠 게 뻔할 노릇이고
빈손으로 갔다간 큰 소리 치고 박차고 나온 내 체면이 말이 아닐 테고.
이런 내 깊은 시름은 아랑곳 않고 경매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기계음과
여기저기서 실랑이를 벌이는 상인들의 볼멘소리,
줄지어 선 춘란들의 비명소리,
지구가 묵직하게 자전하는 소리가 한데 섞여 나를 휘감아 돈다.
아..나는 어쩌다가 이 빌어먹을 토끼 굴에 발을 들여 놓았단 말인가.
이제 그만 나도 그것처럼 <사라지고 싶다>. 그 무엇의 형태로든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