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자(五味子) 이야기
한낮 산비탈
불볕더위 거만한 바람이
듬성한 돌밭위로
걷지도 않고 도망이다
간혹 흐르던 계곡물마저
땡볕에 타들어 가고
바닥은 풀썩 갈라졌다
더위에 숨죽인 여린 덩굴
여름내 다래나무 시샘 받으며
커지지 않는 조막열매 맞잡고
흐느껴 울다
이슬이 내리는 밤이면
별빛 닮은 알맹이 만들고
여름 모서리에 송알송알 붙어
때 이른 가을을 부른다
하늘이 높다.
금방 손에 닿을 듯 머리 위에서 이글대던 태양이 아른아른 멀어져 간다.
높다란 산을 오를수록 한여름 흐르던 땀 보다는 상쾌함이 앞선다.
어느덧 가을이 되었나 보다.
힘겹게 계곡을 오르다보니 가파른 비탈을 가로지르는 험한 돌무더기위를
어지럽게 널린 덩굴이 막아선다.
붉은 빛깔이 유난스레 돋보이는 줄기에 송알송알 붉은 송이 열매가
시야를 자극하며 매달려 있다.
보기만 해도 침샘이 흐를 만큼 시큼 새콤한 맛이 눈을 감기게 하는 오미자 열매다.
오미자는 깊은 산속, 심산의 골짜기에 많이 자란다.
특히 바위가 많이 분포되어 계곡이 거칠고 척박한 환경에서 무리를 이루어
자라는 다년생 덩굴성 식물이다.
담쟁이나 노박덩굴, 혹은 으름덩굴처럼 굵게 자라진 못하지만
가녀린 줄기를 뻗으면서도 꽤나 높은 나무의 끝자락까지 감고 오르는
굳센 지구력을 자랑하는 식물이기도 하다.
오미자의 줄기는 멀리서 얼핏 보기만 하여도 식별이 가능할 만큼
붉은 빛을 띠고 있는데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홍내등”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꽃은 연한 황백색으로 제법 향기가 좋고 꽃이 지면 완두콩만한 열매가
줄기 끝에 매달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이 대부분의 열매는 한 송이의 꽃이 피면 한 개의 열매가 매달리는
일화일과인데 비해 이 오미자의 열매는 한 송이의 꽃이 피고 나면
그 꽃에 매달리는 열매는 포도송이처럼 많은 개체가 매달린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재미있는 식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미자라는 이름의 유래는 우리 혀가 맛을 볼 수 있는 다섯 가지의 모든 맛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열매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시고 달고 쓰고 맵고 짠 맛이 모두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맛은
짠맛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맛이 나는 열매이니 만큼 우리 몸에 작용하는 약성도
그만큼 많은 작용을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중에서도 오미자는 진해, 거담작용이 강하여 “해수를 다스리는 귀신같은 약”으로
불리울 만큼 기침이 나면서 숨이 차는 증상을 치료하며 간(肝) 기능을
강화 하는 작용이 탁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양기를 돋우는 작용이 강하여 허약한 체질을 개선하는
효과가 큰 것으로 유명하다.
<동의보감>에는 “오미자는 남성의 정(精)을 돕고 양물을 커지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신농본초경집주>에는 “성교 시간을 길게 하고 몽정과 조루증을
막는 작용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바 현대의 남성들이 한번쯤은 꼭
먹어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에 충분한 성약(聖藥)이 아닌가 한다.
또한 약성이 따뜻하고 열성이어서 감기 초기증상일 때 복용하면
세포의 땀구멍을 열어 사기(死氣)를 몰아내고 번열(煩熱)을 없애며
중추신경계의 흥분작용이 있어서 뇌파를 자극하는 성분도 있다하니
공부를 하는 수험생은 물론이요 요즘처럼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직장인들에게
꼭 필요한 약초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오미자국에 계란을 넣으면 계란이 모두 녹아 없어져 버린다고 하는데
이는 오미자가 지방을 분해하고 녹이는 성분이 탁월한 때문이라 하겠다.
그래서 오미자는 담즙 분비를 촉진하여 간 기능을 개선하는 신약으로도 불리운다.
그러나 모든 약초가 그렇듯이 효능이 좋다고 해서 모두가 그 효과를 볼 수는 없는바
오미자 역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 열성이 높은 약초인 만큼
너무 과량 복용하거나 시와 때가 없이 상식하면 몸을 보하는 작용이 지나쳐서
폐를 수렴(垂簾)하여 허열(虛熱)을 일으킬 수도 있다하니 내 몸이 충분히 적응하고
소화해 낼 수 있는 만큼만 적정량 복용함이 필수 요소라 하겠다.
제법 높은 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하산 길에 이런 저런 상념과 더불어
잠시간 오미자를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산 능선에 소슬한 바람이 인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린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니 어둑해진 길섶에 엎드린 풀빛이 여리다.
길고도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덥고 습한 여름이 어느 틈에 떠나 버리고
새침한 바람과 머리맡을 스치는 마른 풀내음이 푸석한 가을이 되었다.
굳건히 여름을 지켜낸 화려한 꽃들이 떠나면서 만들어낸 씨방들은
튼실하게 부풀려 간다.
진초록 푸르름으로 생동감을 주던 산야가 떠나면서 남긴 가녀린 웃음이
처량한 아름다움으로 비춰지고 한 계절을 지켜낸 꽃과 나뭇잎들은
한해의 임무를 마치고 모두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생각하기만 하여도 슬픔과 아쉬움으로 가득차서 금방이라도
까마득한 계곡 밑으로 떨어져 내릴것만 같다.
지금 가버리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아 지나친 여름을 생각하매
조바심과 안타까움이 앞선다.
아쉬움에 작은 계절의 조각들을 다시 꺼내어 하나하나 새로이 조합해 본다.
내년에도 이 무렵이 되면 굵고 튼실한 열매들이 알알이 영글어 갈 것이고
다시금 다가올 봄을 위하여 엎드려 길고 긴 겨울잠을 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남은 시간은 매우 길 것이라 생각된다.
이 계절이 돌고 도는 한은 남은 추억 쌓기는 계속 이어지리라.
月刊 蘭世界 2015.10월호 연재 中